suerte, mala suerte
오늘 하루는 정말 최악이었다. 이상한 꿈을 꿔 아침부터 지각을 하지 않나, 노트북은 말썽에, 제일 좋아하는 학식인 런치 A세트는 sold-out, 마지막 피날레로 가는길에 소나기까지. 하필 우산도 다 팔린 상태라 어쩔 수 없이 비에 푹 젖어버린 피곤에 찌든 몸을 억지로 이끌어 집으로 향했다. 빨리 6평이 채 안되는 작은 방에 들어가 마음에 안정을 취하고 싶었다. 근데 말했었나? 세상 최악의 일은 마지막에 온다고. 전에 있던 일들이 손가락에 뭐가 찔려 살짝 따끔한 소소한 불행이라면 그 일은 그 따끔한 상처에 핫소스를 뿌린 아니, 캡사이신을 뿌린 듯이 타들어가는 불행이었다.
눈 앞에서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 그런 고통을 느꼈다. 지금 그게 그렇게 큰 고통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앞에 그 불행을 겪고 정신적 고통이 만땅인 상태에서 축축한 몸을 이끌고 겨우 지하철 역에 도착했는데 그걸 못 타다니. 그 다음 열차는 금방 오지도 않는다. 무려 십오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우으…”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왜 다들 그렇게 철저한지, 아니면 운이 좋아서 우산을 살 수 있었던 것인진 모르겠지만 비에 젖은 사람은 자신 뿐이었다.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르겠지만 모두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아서 얼굴로 피가 쏠렸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큰 맘 먹고 택시를 타려고 다시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갔다.
다니고 있는 대학 근처 역이라 아는 사람이 나타날까 걱정하며 조심스레 택시를 찾았다. 요즘엔 왜 택시앱으로 택시가 안잡히는지, 택시앱에 시간은 하염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이것 또한 소소한 불행일까?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찰나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논?”
이런 꼴로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더욱 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알피…”
“이런, 이게 무슨 일이야. 흠뻑 젖었네.”
“그게… 소나기가 왔었어.”
어색한 웃음을 한 번 보내고 어서 이 상황에서 빠져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아무런 해답도 나오지 않았다. 쭈뼛거리고 있는 걸 보던 알피노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하논의 얼굴에서 흐르고 있던 물방울을 닦았다. 하논의 핸드폰에 켜져있는 택시앱을 힐끗 본 알피노가 말했다.
“감기 걸리겠다. 택시타고 가려고?”
“으응… 지하철은 놓쳐서.”
“요즘에 택시 잘 안잡히던데.”
“그러게 말이야…”
그리고 그 말도 했었던가? 불행 뒤에 행운이 찾아온다는 말.
“그럼 우리집에 들릴래?”
“으응? 아, 아니야.”
“아니. 우리집에 가자. 알리제 옷 빌려줄게.”
“…알리제 옷은 너무 클 것 같은데에.”
“원피스 같은건 상관 없지 않아? 그냥 이대로 보내기엔 내 마음이 많이 불편할 것 같아서 그래.”
하루 종일 불행을 겪었던 건 이 행운을 위해 있었던게 아닐까. 하논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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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착한 알피노의 집은 아무도 없는지 조용했다. 엄청 넓은 집에 아무도 없으니 조금 쓸쓸한 느낌이 났다.
“여기서 씻고 나오면 돼.”
“응… 고마워.”
그렇게 들어간 화장실 조차 자신의 자취방과9ㅣ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넓었다. 샤워 부스 안에 있는 샴푸와 바디 샴푸는 적어도 3종류는 되어 보였다. 파란색 샴푸통에 들어있는 샴푸를 손에 쭉 짜냈다. 킁킁-. 향을 맡아보니 알피노와는 다른 향이 났다. 샴푸를 가볍게 씻어내고 이번에는 갈색 통에 들어있는 샴푸를 쭉 짜냈다. 익숙한 향기였다. 왠지모르게 부끄러워져 하논은 그 샴푸를 사용해 빠르게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이렇게 씻으면서 어린시절이 생각나는 이유는 날씨가 꾸물꾸물해서일 것이다. 알피노와 하논은 소꿉친구였다. 어렸을 때 부터 가문 간에 교류가 있었던, 부모님끼리 아는 사이라 아이들도 친해진 그런 경우였다. 그 관계는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논이 12살 때 산산조각이 났다. 원인은 부모님의 교통사고였다.
비가 세차게 오는 날 부모님이 기사를 동행하지도 않고 단 둘이 운전을 해서 어딘가를 향했다는 것은 나이가 먹은 지금 생각해보면 어딘가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뜬 그 사고로 인해 하루아침 부모님을 잃어버린 하논은 보험금과 재산을 노리는 친척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할머니와 단 둘이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숨을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렇게 큰 집에 계속 혼자 살걸 생각하면 그것도 외로워서 힘들것 같긴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완벽하게 혼자가 된 하논은 자신의 통장에 막대한 돈이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원룸에서 살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외로움. 그것이 하논을 힘들게했다. 같이 놀러다니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본질적인 외로움을 없애주진 못했다. 그렇게 혼자 얼레벌레 생활하던 중, 대학에 들어와서 정말로 우연히 르베유르 쌍둥이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쌍둥이는 키가 많이 커 있었다. 분명 자신보다 작거나 비슷했었던 것 같았는데, 어느새 성인이 된 그들은 고개를 올려야지만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엄청 반가워하면서도 연락 한번도 없어서 섭섭해하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는건 매우 곤욕이었다. 아직까지도 그 날을 생각하면 위가 쓰려왔고, 혼자남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 같아 불편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눈가에 물방울이 그렁그렁 매달려있었다. 오히려 담담하게 말하는 자신이 이상해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연락 한번 해주지. 알리제가 웅얼거렸다. 사실 하논은 연락을 하려고 했었었다. 몇번이고 수화기에 그들의 집전화를 눌렀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16살 어느날, 굳게 마음을 먹고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번호라고 떴을 땐 많이 시무룩해져 조금 훌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쓰게 웃기만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쌍둥이는 바쁜 와중에도 하논을 잘 챙기려고 노력했다. 겹치는 과가 없어 만나기 힘든 와중에도 꼬박꼬박 점심을 같이 먹고 술도 먹고 그 동안 쌓지 못한 우정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2학년까지였다. 알피노는 의대생이었는데 본과 1학년에 들어가자 만나기 힘들어졌다. 알리제는 워낙 인싸여서 동아리, 총학생회 등 여러 일을 하느라 바빴고 하논도 3학년 부터는 빡세진 실기 시험 준비로 바빠졌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우연히 알피노를 만난건 정말로 행운이었다.
“알피노… 그... 다 씻었는데.”
“문 앞에 옷 내려놨어. 그거 입어.”
유전자의 영향인지 알피노와 알리제는 마치 콩나물 마냥 자랐다. 고등학생 때 까지만 해도 분명 앞자리에 앉은 만큼 작았는데 어느새 대학 들어갈 시기쯤엔 키가 거의 2미터에 가까울 만큼 자랐다. 그 때문에 고등학교 동창들은 신기해하기도 시기와 질투를 보내기도 했다. 하논은 알리제의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분명 알리제한텐 짧았었던 것 같았던 원피스인데 자신이 입으니 거의 종아리까지 내려왔다. 약간 침울해진 마음으로 머리를 털었다.
“알피-. 다 입었어.”
“응, 그… 잘 어울려 하논.”
“그러기엔 너무 큰데…”
“너는 뭐든 잘 어울리니까.”
하논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래봤자 나오는 거 없다 뭐. 기분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만 같아, 조그맣게 심호흡을 했다. 착각하지 말자. 그는 알피노다.
이게 무슨말이냐, 알피노는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정중했고 다정했다. 이것이 같은 성이여도 착각할 법 했으니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 더 쉽게 착각에 빠지곤 했다. 유명한 일화도 있었다. '술취한 동기들 뒤치닥거리를 항상 하는 알피노지만 그걸 몰랐던 신입생들은 그렇게 사랑에 빠지곤 했다.'라는 소문. 외모도 나쁘지 않겠다, 집안 좋다는 소문도 있고, 거기다 다정하기까지. 착각하게 많들 수 밖에 없는 스펙이었다.
어느샌가 남자가 된 소꿉친구는 심장을 기분좋게 뛰게 만들곤 했다.이 사람은 그냥 모두에게 친절하다. 이걸 맨날 생각하면서 점점 커져가는 마음을 다잡았다. 괜한 고백을 했다 차이면 친구 이하의 사이가 될 것이기 때문에.
“진심이었는데…”
“맞다 알피-. 이번주 금요일에 뭐해?”
“으음, 아마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을까?”
“그러엄… 나 학교 근처에서 버스킹 할껀데…”
“꼭 보러갈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하논은 ‘헤헤-.’ 하고 웃었다. 그가 보러온다니까 오늘부터 맹연습할 거라고 다짐하며 아직까지 축축한 머리를 쓸었다. 그런 모습을 본 알피노가 하논에게 말했다.
“하논. 머리 드라이 해야지.”
“응, 드라이기 어디있어?”
“이쪽으로 와. 내가 말려줄게.”
알피노는 하논의 손목을 살짝 잡아 끌어당겼다. 하논은 마치 힘없는 풍선처럼 끌려갔다. 알피노는 그런 하논을 의자에 앉혀놓고 드라이기를 켰다. 그렇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바람, 알피노가 살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느낌 때문에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졸려 하논?”
“으응… 눈이 감겨어.”
“이거만 말리고 자자. 안말리고 자면 피부에 습진 생겨.”
의대생다운 말이었다. 하논은 잠기는 눈을 최대한 부릅 뜨려고 노력했지만 다시 스르륵 눈이 감겼다. 잠에서 깨려고 하논은 괜스레 옛날 이야기를 꺼냈다.
“알피-. 그런데에, 옛날에는 이런 말투가 아니었잖아아.”
“아, 애늙은이 같다고 욕 많이 먹었지.”
알피노가 웃으며 말했다. 옛날에 말이야, 친구들한테 징그럽다고 욕 먹은 후에 바꾼 것 같아. 담담하게 알피노가 말했다. 사실 뭐라고 말하든 상관 없지만, 계속 이상하다고 바꾸라고 하니 귀찮아져서 말이야. 하논은 어렸을 때의 알피노를 떠올렸다. 항상 하게-체로 말을 하던 알피노는 근처 어른들한테서(당연히 어른들한텐 존댓말을 썼다.) 애늙은이 같다는 말을 많이 듣곤 했다. 본인은 신경쓰지 않아서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는 그 모습이 멋져 보였었다. 생각해보면 어른들 입장에선 귀여웠을 것 같았다. 요정같이 생긴 남자애가 ‘그대는 잘하고 있네.’처럼 60대가 쓸 법한 말투를 쓰는 걸 보면 말이다. 흥 걔들이 너의 귀여움을 몰라서 그래. 하논이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그 모습에 알피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 말렸다.”
알피노는 머리를 한번 빗으로 빗어주고 하논의 온 몸에서 나는 자신과 똑같은 향기가 좋아 한번 코를 킁킁 거렸다.
“알피. 방금 강아지 같았어.”
“나를 동물 취급하는 건 여전하다니까.”
하논은 어렸을 때 알피노를 알파카라고 많이 불렀었다. 그렇게 부르게 된 계기가 있었다. 두 가족이 같이 양떼 목장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알피노랑 닮았다며 하논은 그 날 하루종일 알피노를 알파카라고 불렀다. 알피노는 나는 알파카가 아닐세! 하고 외쳤지만 하논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어느정도 체념한 알피노는 그 뒤로 가끔 하논이 알파카라고 불러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오늘 우리집에서 자고가는게 어때? 알리제도 널 보고 싶어 했어.”
“그러고 싶은데… 내일 체육대회잖아. 체육복 집에 있어서… 가야될 것 같아.”
“그러면 태워다 줄게.”
알피노는 자신의 차키를 챙겼다. 아, 아니 혼자가도 되는데. 하논의 중얼거림은 알피노에게 닿지 못했다. 알피노는 흥얼거리며 하논을 데리고 차고로 향했다. 그의 애마인 벤츠 E 클래스는 딱 봐도 깨끗해, 항상 신경쓰는 티가 났다. 괜히 흠집이라도 날까봐 문을 조심스레 연 하논은 자신의 옷이 들어있는 쇼핑백에서 물이라도 샐까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놨다. 얻어타면서 더럽게 쓰기라도 하면 정말 미안해서 얼굴을 들지 못할 것 같았다.
“저번에 거기로 가면 되는거지?”
“응, 맞아.”
네비게이션을 킨 알피노는 어색함도 없이 즐겨찾기 목록을 누르고 하논의 집주소를 눌렀다. 하논의 자취방은 알피노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 시간이 좀 느리게 가면 좋겠는데. 하논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노래라도 들을래? 알피노는 친절하게 하논이 좋아하는 (하논이 예전에 추천해준) 노래를 틀어주었다. 이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 하논이 놀라는 표정을 짓자 알피노는 머쓱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냥…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을 뿐이야. 하논은 자신이 좋다고 한 노래를 계속 들었을 그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벌써 도착했네.”
“가까우니까.”
하논은 내려서 조심히 문을 닫았다. 조수석 창문을 내린 알피노가 얼른 들어가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하논은 손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2층. 하논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밖을 내다봤는데 아직까지 알피노의 차가 있었다. 3층. 아직까지 시동을 꺼놓은 알피노의 차는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4층, 하논이 집안에 들어가서 불을 키고 후다닥 창문으로 향했다. 하논이 잘 들어가는 걸 확인하려는 모양이였는지 그제서야 시동이 켜지고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러한 사소한 행동도 배려심이 넘쳐났다.
많이 피곤했던 하논은 옷만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바로 누웠다. 딱히 뭘 먹고 싶지도 않았다. 띠링-. 핸드폰이 연락 왔다고 티를 냈다. 힘들어서 핸드폰 할 힘도 남지 않았지만 혹시 알피노 연락일까봐 정말 약간의 힘만 사용해 핸드폰을 열었다.
(광고) @@은행입니다. 고객님은 낮은 금리로 어쩌구… 그 문자를 보자 약간 남아있었던 힘조차도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한숨을 쉬었다. 띠링-. 이번에는 속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무시하고 잠에 드려고 노력했다. 띠링-. 광고성 문자가 두개 연달아 오진 않을텐데. 그 생각이 든 하논은 벌떡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다시 열었다.
하논, 밥 먹었어?
안먹고 자는 건 아니지?
뜨끔한 하논은 뭐라고 보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다,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응, 먹었어.
거짓말 (화난 알파카 이모티콘)
진짜인데… 알피 나 못믿어?
아, 아니 믿어
당황해 하는 알피노의 모습이 눈 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그런 알피노를 조금 더 골려줄까 생각하다 아쉬움을 참고 놀리기를 그만두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지잉- 하고 울렸다. 당황해서 핸드폰을 놓칠뻔 했지만, 그 짧은 시간 남은 21개월 할부를 생각해내 다시 꽉 잡았다. 화면에는 알피노라는 세글자가 떠 있었다. 다시 한번 당황스러웠지만 큼-하고 목을 한 번 풀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알피 무슨일이야.”
‘화난건 아니지?’
수화기 넘어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난적 없는데. 하논이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이 맞은편 수화기에서 부터 넘어와 하논의 귀로 들어왔다.
“그거 때문에 전화한거야?”
‘생각해 보니 왜 하논은 3학년인데 체육대회를 참가하나 싶어서.’
그거에 관해서는 할말이 정말 많은 하논이었다. 원래 대부분 2학년까지만 참가하는 체육대회 행사는 3학년인 하논과는 이제 먼 나라 이야기 같았었다. 그렇다, 같았었다. 두 번 강조하는 이유는 하논도 정말 어이없게 참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음대생들은 가끔 콩쿨을 나가거나 국내외 대회를 나가는 경우도 가끔 생기곤 했다. 그렇게 되면 체육대회가 자연스레 면제가 되는데, 이 점을 2학년들이 대거 악용했고 인원 수가 부족해 3학년 중 몇명이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논은 운이 안좋게 제비뽑기로 뽑혀버렸다. 어차피 머리 수만 채우면 되긴 하지만 시간이 아까운 것도 사실이었다. 곧 중요한 수행평가가 있는데 말이야. 하논은 신세한탄을 늘어놓았다.
“알피노는 참여한다했나?”
“응 우리는 본과 1학년까진 참여해야해.”
“6년의 반이면… 그렇네, 올해까지네.”
체육을 싫어하진 않아서. 알피노는 웃으며 말했다. 체육도 잘하다니. 그거 너무 사기적이야. 하논은 신이 무심하다고 생각했다. 누구한테는 능력치와 재력, 얼굴을 몰빵 해주고 누구는 안주고. 편애하는게 너무 눈에 띄었다.
“그럼 내일 응원하러 갈게. 나- 한 종목만 참여하거든.”
‘뭐 참여해?’
“달리기.”
하논이 선택할 수 있는 종목은 많았지만 최대한 예선전 없이 짧고 빨리 끝나는 건 달리기라 하논은 그걸 선택했다. 음대는 그렇게 체육대회에 목을 메는 과는 아니라 하논에게 바로 합격의 목걸이가 내려졌고 그렇게 선택지의 이야기는 막을 내렸다.
‘달리기하는 거 제일 앞에서 응원할게.’
“시간되면 보러와. 그래서 알피노는 뭐 참여하는데?”
농구. 키가 커서 그냥 선택당했어. 알피노는 살짝 웃었다. 농구장에서 농구를 할 알피노를 떠올리니 내일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멋있을꺼야. 하논은 말했다.
‘그럼 내일 봐. 잘자고, 여름이라고 너무 얇게 입고자지마.’
“알겠어. 나 애기 아니야 알피.”
‘걱정되니까 그래. 잘자’
“응 알피도.”
그렇게 전화를 끊은 하논은 잠시 멍 때리다 침대에 얼굴을 폭 숙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안되는데, 이러면 알피가 점점 더 좋아져서 안되는데. 갑자기 이런 고민을 하다 평안할 알피노를 생각하니 살짝 울컥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런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하논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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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운수가 좋았다. 아침에 알람이 울리기 1분 전에 개운하게 일어났고, 화장은 잘먹었고, 대중교통은 제때 왔으며 수업도 십분 일찍 끝나서 인기 많은 런치 A 세트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오늘 꿈은 알피노가 알파카가 되어 농구를 하는 꿈을 꾼 것 같았다. 네개의 다리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알파카 알피노는 귀여웠었던 것 같다. 본인은 들으면 싫어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이유로 하논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대충하려 했던 달리기도 진심으로 뛰어볼 생각까지 들었다. 3초만에 생각을 다시 바꾸었지만 말이다. 이제 슬슬 알피노가 속한 의예과 농구 결승전이 있을 예정이었다. 하논은 짐을 대충 사물함에 넣어놓고 자물쇠를 잠궜다.
밖은 생각보다 더웠다. 날씨도 더웠고 학생들의 열정도 넘쳐나 더욱 더웠던 것 같았다. 역시 음대만 체육대회에 관심 없는게 분명했다. 여기저기 시끌벅적했고 역시 20대 청춘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대학 다웠다. 좋을 때네-. 하논은 웃으며 둘러보았다.
“하노온!!”
누군가 저 멀리서 양 손을 높게 들어 흔들고 있었다. 누구지? 하논은 실눈을 뜨고 그 쪽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 누군가가 후다닥 달려왔다. 마치 경주마같이 달려온 그는 하논을 꽉 껴안았다. 알리제였다. 아디X스 체육복을 위 아래로 입은 그녀는 정말 누가봐도 체대생 다웠다.
“뭐야. 어디가?”
“알피노가 농구를한다고 해서 말이야. 응원하러 가려구.”
“에엥. 그거보단 내 경기 보러와. 거기 우리과랑 대결하는거라 재미없게 끝날 껄?”
“그래도 보러가야지. 아! 그리고 옷 잘입었어. 세탁해서 돌려줄게.”
그거? 그냥 입어도 돼. 나보다 너가 더 잘 어울린다던데. 알리제가 괜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마 필시 알피노가 빌려줬다고 말하면서 쓸데없는 대사를 한마디 더 한게 틀림 없었다. 하논은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알리제는 그런 하논을 보며 킥킥 웃다가 품에서 놓아주었다. 빨개진 얼굴을 손부채질 하며 하논은 말했다.
“근데 무슨 경기 뛰어?”
“하도 많아서. 그냥 시간 겹치는 거 말곤 다 들어가.”
“역시 체대생.”
“중에서도 탑이지.”
알리제는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였다. 저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진짜 나 너무 인기쟁이라니까. 알리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휘젓고 하논에게 인사했다.
“하논 나중에 보자.”
“응!”
야, 알리제 빨리 오라고! 열심히 소리치는 한 남자애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며 알리제는 그 쪽으로 뛰어갔다. 그렇게 혼자 남은 하논은 시간을 한 번 본 뒤 농구장 코트 쪽으로 향했다.
농구장 주변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하논은 처음엔 자신이 시간을 착각해서 이미 시합이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하논은 다행이 몸을 풀고 있는 알피노를 발견했다. 시합은 아직인 것 같았다. 대충 비어있는 자리에 착석을 한 하논은 이쪽을 봐달라는 듯 알피노를 열심히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텔레파시는 통하지 않은 듯 했다.
“야, 사람 왜이렇게 많아?”
“알피노 선배 때문 아니야? 그 선배 인기 많잖아.”
하논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하고 기울였다. 이야기는 앞에 여학생들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최강의대라 적힌 파란티를 입고 있는 여학생들은 하논이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도 모르는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인기 많을만 하지. 근데 저 선배 임자 있다매.”
“엥 진짜? 처음 듣는데?”
그건 하논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분명 알피노는 지금 여자친구가 없는게 분명했다. 저번 주에 관심 있는 여자있는지 물어봤을 때도 희미하게 웃고 넘겨서 혹시 여자친구 생긴거 아니냐고 물어봤었다. 그때 분명 없다고 그의 입에서 확실하게 들었던 대답이다. 하논은 다른 곳을 쳐다보는 척 하면서 귀를 더욱 더 주의깊게 기울였다.
“아니, 그 일학년에 양갈래 알지.”
“아 걔? 이름 뭐였더라 기억이 안나네.”
“째뜬 걔가 고백했을 때 관심있는 사람 있다고 미안하다고 찼대!”
“아니 언제 고백했대?”
처음 듣는 사실에 하논도 점점 흥미진진 해졌다. 아니 근데 내가 생각해봤을 땐 그 선배중에 쿠루루 라는 선배 있잖아. 알피노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 쿠루루 선배 같아. 그 이야기를 들은 하논은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알피노와 아무런 친분이 없는 여자애가 막 지어내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해주면서 좋아하는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던 알피노였다.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아서 선을 긋는 걸까? 하논은 안좋은 생각이 차례차례 떠 오르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 봐봐. 알피노 선배가 다 친절하지만 쿠루루 선배한테는 좀 불퉁대거나 하잖아? 뭔가 더 친해보인다고 해야하나.”
“아 그런 느낌은 있긴 하지.”
“그리고 저번에 둘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데.”
“근데 그 둘 멘토멘티 아냐?”
“그건 그렇지만.”
에이 뭐야, 그냥 니 생각이네. 다른 여자애가 식었다는 듯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나머지는 알피노와 관계없는 이야기들 뿐이라 하논은 관심을 꺼버렸다. 뒤에 내용 때문에 다시 규칙적으로 심장이 뛰었다. 그래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알피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괜찮아진 하논은 경기가 시작하길 기다렸다.
삑-. 경기가 시작한다는 호루라기가 울려퍼졌다. 양 팀 선수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신들의 포지션 위치로 돌아갔다. 알피노는 스몰 포워드 역할을 맡은 듯 했다. 사실 키만 보면 센터를 해야했지만 3학년이라 좀 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 처럼 보였다.
삐빅! 이번엔 조금 더 크게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경기가 시작했다. 알피노는 설렁설렁 하는 것 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앞에 공이 오면 잘 막아내고 빠르게 패스를 해 공을 돌렸다. 하지만 상대는 알리제가 말했듯 체대생들이었다. 밥먹고 운동하는 애들과 밥먹고 공부하는 애들의 체력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잘 막아내는 듯 보였지만 결국 후반부에 가서는 체대생들이 날라다니는,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의대생들도 그냥 여기까지 올라온 걸 다행이라 여기는지 설렁설렁 응원가를 부르고 쉬고 있었다. 맞은 편 체대생들은 열정 가득하게 응원가를 부르고 소리를 질렀다. 저정도면 그냥 우승 줘라. 앞의 여학생의 말에 두번째로 공감을 느끼는 하논이였다.
삐익-. 경기가 종료되었다는 호루라기가 울렸다. 경기를 뛴 의대생들은 처참한 경기결과를 신경도 쓸 틈 없이 코트 위에 벌러덩 누웠다. 스피드 빠른 체대생들을 따라다니려니 어쩔 수 없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알피노도 똑같았다. 차마 누울 수 없었던 알피노는 앉아서 헉헉거리며 이리 저리 둘러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했다. 그 순간 하논과 알피노의 시선이 마주쳤다. 알피노는 씨익 웃으며 손 인사를 했다. 하논도 손인사를 보냈다.
“야! 방금 봤냐? 알피노 선배가 나한테 웃어준거?”
“아닌데? 나한테 해준건데?”
앞의 여학생들은 서로 자신한테 인사해준 거라며 꺅꺅거렸다. 하논은 그 모습이 어이없으면서도 귀엽기도 했으며 우쭐한 느낌도 들었다. 아닌데 나한테 해준건데. 하논은 우월감에 도취되었다. 여러분 모두 봐주세요! 저 아이가 제 소꿉친구랍니다! 그렇게 외치고 싶어진 하논은 겨우 목구멍 아래로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수들은 각자에게 다시 인사를 하고 경기를 끝냈다. 그리곤 서로 자신의 친구들에게 발걸음을 향했다. 알피노도 하논에게 발걸음을 향하다 한 여성에게 잡힐 수 밖에 없었다. 그 여성은 짖궂은 표정으로 알피노에게 무언가 말을 하는 듯 했다. 너무 멀어서 아무이야기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 둘의 표정은 다채롭게 바뀌고 있었다. 주로 알피노는 곤란하다는 얼굴이었고 여성은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뭐야 쿠루루 선배잖아.”
“지금 인턴하고 있을 때 아닌가?”
“잠시 왔다보네. 와 진짜 둘이 사귀는 거 아냐? 인턴 쉬는 날 학교를 온다고?”
잠시 조용했던 앞자리 여학생들은 특종이라는 듯 입을 떠들어댔다. 그 이야기를 듣자 하논은 다시 심장이 불편하게 뛰었다. 아니겠지, 아닐거야.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 하논은 중얼거렸다. 불편해진 하논은 알피노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한편 알피노는 갑자기 자리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하논을 보며 붙잡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쿠루루와 자신의 사이를 오해한 것 처럼 보였다. 초조해진 그는 쿠루루를 버리고 하논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둘러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알피노도 하논과 같이 심장이 불편하게 쿵쿵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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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시합은 비가와서 취소가 되었다. 저번에 소나기에 호되게 혼나고 우산을 상시 가지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던 하논은 이번엔 비를 맞지 않고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분명 비를 안맞고 운이 좋았던 하루였지만 기분은 어제보다 좋지 않았다. 우울해진 그녀의 집에 갑작스레 찾아온건 알리제였다.
“리제. 무슨 일이야? 비를 왜 이리 맞았어?”
“이 근처에서 술먹다가 너가 생각나서 찾아왔어! 욕실 좀 쓸 수 있을까? 대신 이건 선물이야!”
알리제의 두 손엔 술과 안주가 가득 담겨있었다. 진짜 술을 먹다 온 것인지 그녀에게선 약간의 알코올의 냄새가 났다. 어벙벙해진 하논을 뒤로하고 알리제는 문을 닫고 들어가 욕실로 바로 향했다. 혹시 입을 옷 있으면 앞에다 놔둬줘. 알리제가 소리쳤다. 우울해서 혼자 있고 싶었던 하논이였지만 알리제가 사온 술을 한 번 보곤 침을 꿀꺽 삼켰다. 기분도 꿀꿀하니 술로 달래줄 필요가 있다 느낀 하논은 알리제가 나오길 기다리며 안주와 술을 상에 차려놓았다.
생각보다 금방 나온 알리제는 하논이 준비해 놓은 츄리닝을 입고 머리를 탈탈 털고 있었다. 하논에겐 조금 컸던 츄리닝인데 알리제에겐 조금 작은 느낌이었다. 알리제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수건으로 머리를 감쌌다. 머리 안말리게? 드라이기를 가르키며 하논이 물어보았지만 알리제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리곤 차려놓은 술 상 앞에 앉아서 얼른 하논도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술 좀 연하게 마실래? 음료수 타줄까?”
“아니! 오늘은 취할꺼야.”
양손을 꽉 쥐며 다짐하는 하논을 웬일이냐는 듯 알리제가 쳐다보았다. ‘딱-.’ 하고 술병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오랜만의 음주라 조금 걱정되었지만 하논은 꿀꺽꿀꺽 잘 마셨다. 안주도 안먹고 원샷하는 하논의 입에 알리제가 안주를 하나 넣어주자 잘 받아먹었다. 아기새 같아. 알리제는 그런 하논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았다.
평소의 하논은 1병 마시면 애교가 늘었고 2병 마시면 그 다음날 기억을 잃었다. 근데 왠일인지 오늘은 아직 한병을 마시기 전인데 얼굴이 붉게 물들었고 취한 듯 딸꾹질을 했다. 그런 모습을 재밌다는 듯 엘리제는 휴대폰으로 찰칵하고 사진을 찍어댔다.
“찍지마아-.”
“응, 안 찍었어.”
“거짓말 하지마아. 방금 소리 들렸는데에.”
하논은 잔에 담긴 술을 목구멍으로 훌러덩 넘긴 뒤 힘든지 머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그리곤 기분이 좋은지 노래를 흥얼댔다. 아마 잘 안들렸지만 요즘에 연습하고 있는 팝송이 틀림 없었다. 알리제는 이제는 숨길 마음도 없는지 대놓고 영상 촬영까지 하기 시작했다. 띠링 소리가 나자, 하논은 머리를 홱 들더니 촬영하고 있는 알리제를 째려봤다. 촬영 안한다면서어. 알리제는 대답없이 웃기만 했다. 찡그리고 있던 하논은 카메라를 향해 베시시 웃어보았다. 오 이건 좀 비싸게 받아야겠다. 알리제가 하논은 알 수 없는 말을 했지만 이미 하논은 취해서 상관 없는 듯 했다.
“있자나… 나는 알피가 좋은데, 알피는 아닌가봐아.”
“그게 무슨 말이야? 그건 아닐텐데.”
“오늘 소문을 들었는데에. 그… 쿠루루라는 사람이랑 알피가 사귄대.”
“아니야. 그건 진짜 아닐… 에휴 취한 사람한테 말해서 뭐하냐.”
진짠데-. 내가 오늘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에. 사이 좋아보였는데에에! 하논은 그렇게 말하더니 훌쩍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머지 촬영하던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알리제는 그런게 아니라며 하논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훌쩍이는 하논을 향해 알리제가 말했다.
“직접 물어보는건 어때? 알피노도 연락 기다리고 있어.”
“시러어-. 괘씸해서 연락 안할꺼야.’
훌쩍이는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곤 숨 쉬는 소리만 방안에 가득했다. 알리제는 여전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내가 아는 사람 얘기해줄까? 있잖아. 내가 아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어렸을 때 부터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대. 근데 그 사람이 좋아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사라진거야. 정말 흔적도 없이. 그 사람의 부모도 그 아이를 알아서 같이 온 동네를 뒤져서 찾곤 했대. 나중에 소문을 들었대. 그 아이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사촌들이 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고. 그래도 이 나라는 돈만 있으면 뭐든 되더라. 그 아이가 16살이 되던 때, 어디 살고 있는지 알게된거야. 아이는 조모도 잃고 혼자 작은 방에서 살고 있었어. 그 모습을 본 그 사람은 아이 앞에 짠 하고 나타나려했는데, 갑자기 무서워졌대. 나를 과연 반겨줄까? 도망쳐온건데 나 때문에 들키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그는 그 아이를 다시 찾은 그 겨울날 아이 앞에 나타날 수 없었대. 대신 돌아가서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기로 했대. 그 아이의 사촌들을 아이 앞에 못 나타나게 막고 멋있는 남자가 되기로 자기 혼자 그 아이가 훌쩍이던 그날 밤 자신도 울면서 다짐을 했대. 그리곤 그 아이가 어느 대학에 간다는 걸 듣자 자신과 그 동생도 같은 대학에 원서를 넣었어. 그 둘은 아니… 우리는 어릴 때 지켜주지 못한 너를 이번에는 꼭 지키자고 약속을 했지. 우연히 만난 척하고 너의 과거를 모른 척 하는건 마음에 찔렸지만, 다시 웃는 너를 보니까 좋더라. 그니까, 행복해져야 해. 하논.
하논은 훌쩍이다 잠들어 불편한 자세로 쓰러져있었다. 그런 하논을 가볍게 안아올린 알리제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너무 꼼꼼하게 덮어주어서 나중에 더워진 하논이 이불을 차버린건 비밀이었다. 하논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알리제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울리던 전화음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영상 하나 보낼테니까, 돈 알아서 잘 보내.”
마치 마피아가 마약 거래하듯 자신의 할 말만 하고 뚝 끊어버린 알리제는 어질러져있는 탁자 위를 정리 한 뒤 자신 또한 이부자리를 깔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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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논이 일어난 시간을 아침을 지나 낮을 향하고 있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킨 하논은 어질러져 있을 탁자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하지만 하논의 예상과는 다르게 깨끗한 방을 보니 신기했다. 두리번 거리며 알리제를 찾아봤지만 그녀는 이미 갔는지 방은 조용했다. 하품을 크게 한번 하고 나서 찝찝한 몸을 씻은 뒤 아침을 먹으려고 보니 탁자위에 쪽지가 올려져 있었다. 아마 알리제가 남기고 간거겠지. 쪽지를 잡아올려 무슨 내용이 적혀져 있는지 확인했다.
아침 챙겨먹고, 하논 이제 1병도 못 마신대요.
그녀를 놀리는 쪽지를 남기고 알리제는 새벽 일찍 방을 나섰었다. 다시 돌아와 하논은 그 쪽지를 보고 어제 얼마나 먹었는지 계산해보니 얼추 한병은 마신 것 같았다. 그래도 평소라면 모든 걸 기억했을 텐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평소보다 빨리 마셔서 취했다고 판단한 하논은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 하논은 매우 불안했다. 취해서 쓸데없는 소리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어제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맛있게 끓여진 라면을 먹으며 하논은 오늘 있을 버스킹을 생각했다. 매번 부르던 노래가 아닌 이번 노래는 하논이 부르자고 조르고 졸라 선택된 곡이었다. 알피노가 들어줬으면 해서 그를 생각하며 만든 하논의 자작곡이었다. 또한 그 곡을 그가 들어준다면 꼭 고백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작곡했었다. 그 정도로 그 노래엔 사랑이라는 느낌이 가득했다.
아직까지 그에게 고백할 용기는 안나지만 이렇게 다른 여자에게 뺏길거였으면 고백이라도 할껄 후회가 밀려왔다. 오늘은 꼭 고백하고 차여야지. 이미 차일 생각을 하고있는 그녀였다.
그 곡을 흥얼거리며 나갈 준비를 한 그녀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너무 늦게 일어난 탓인지 벌써 시간은 3시를 향하고 있었다. 버스킹 시작 시간이 6시니까, 곧 나가야겠네. 원래 버스킹하기 전 하논과 멤버들은 연습시간을 갖곤 했다. 연습실까지는 30분 걸리니 이제 슬슬 출발하긴 해야했다. 나가기 전 카톡을 확인한 그녀는 알피노에게서 온 연락을 보지 않고 딱 이렇게 하나만 보냈다.
오늘 꼭 보러와.
연습실에서 연습을 한 후 그녀는 버스킹 할 곳으로 향했다. 자주 버스킹을 했던 이유인지 그들의 버스킹을 좋아해 주기적으로 찾아주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시작 10분 전인데도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버스킹 준비를 하고 하논은 앉아서 목을 풀었다. 오늘 알피노는 왔을까? 오겠다고 했었던 알피노지만 워낙 바쁘기 때문에 올지는 미지수였다. 오라고 연락했는데. 조금 뾰루퉁해진 그녀는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이제 할 시간이야.”
같이 버스킹하는 멤버가 하논에게 말했다. 그 소리에 하논은 일어서서 마이크 앞에 섰다. 큼큼 목을 한번 풀어주고 마이크를 톡톡 건드리기도 했다. 한번 훑어본 그녀는 다른 멤버들도 준비가 끝난 것 처럼 보여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버스킹 보러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큰 함성소리와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그게 조금 줄어들기를 기다린 하논은 소리가 점점 작아져 조용해지자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세곡정도 준비했는데요, 잘 들어주세요.”
그녀는 평소에 잘 부르던 노래 두곡을 열창했다. 그리곤 조금 숨이 가빠졌는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박수갈채가 이어졌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갈증을 느낀 하논은 물 한모금을 마시고 다시 말을 했다.
“벌써 마지막 노래입니다. 오늘은 조금 특별하게 제 자작곡을 들려드릴건데요. 제 사랑이야기 입니다. 오늘 그 사람이 여기 왔을지는 모르겠는데, 꼭 와서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사실 이거 고백 노래이거든요. 알피노 내가 많이 좋아해.”
그녀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렇게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조용한 분위기의 노래가락이 흘러나오자 다들 조용해졌다.
그리곤 그녀는 음악에 맞춰 노래하기 시작했다.
Baby, take my hand
I want you to be my husband
'Cause you're my Iron Man
And I love you 3000
Baby, take a chance
'Cause I want this to be something
Straight out of a Hollywood movie
I see you standing there
In your Hulk outerwear
And all I can think
Is where is the ring
'Cause I know you wanna ask
Scared the moment will pass
I can see it in your eyes
Just take me by surprise
And all my friends they tell me they see
You planning to get on one knee
But I want it to be out of the blue
So make sure I have no clues
When you ask
.
.
.
Baby, take my hand
I want you to be my husband
'Cause you're my Iron Man
And I love you 3000
Baby, take a chance
'Cause I want this to be something
Straight out of a Hollywood movie, Baby
No spoilers please
No spoilers please
No spoilers please
And I love you 3000 접기
노래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생각보다 반응이 더 뜨겁자 그녀는 얼굴이 빨개졌다. 다른 멤버들도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뒷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씩 흩어지자 어느새 아무도 없었다. 역시나, 알피노는 오지 않은 듯 했다. 아쉬운지 한숨을 폭-하고 쉰 하논은 마이크를 정리했다. 그래도 와주었으면 했는데. 내가 큼 맘 먹고 고백한건데.
“하논.”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알피노가 웃으면서 서 있었다. 뭐, 뭐야! 어디서 나타난거야? 놀란 하논이 묻자 알피노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나 뒤에서 계속 듣고 있었어. 사실 하논이 오기 전 부터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거든. 한 발자국 다가간 알피노가 손에 들려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미안. 노래해준 것처럼 반지도 준비 했었어야 하는데, 내가 센스가 없었다. 반지는… 나중에 줘도 될까?”
“으, 응? 이게 무슨 상황이야?”
“고백에 답하는 상황이에요, 아가씨.”
하논은 얼떨떨하게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보니까 꽃다발은 그녀가 좋아하는 흰색 꽃으로 가득했다. 갑자기 부끄러워진 알피노는 꽃다발이 망가지지 않게 아직도 멍한 하논을 살짝 끌어안았다. 정말 행복하게 해줄게, 진짜 정말이야.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온 하논도 두 볼이 빨개졌다.
“나는 꽃다발은 없지만...! 내 선물은 노래야.”
“응, 하논이 준 선물이 더 좋아.”
“알피… 많이 사랑해.”
“나도 사랑해.”
그렇게 그 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고 끝내기엔 너무 아쉬웠다. 그렇게 둘은 사귀게 되었고 후에 들은 소문엔 많은 남자 음대생들이 침울해했다고 한다. 사실 알피노만 유명한건 아니였다. 하논 본인이 들었으면 기겁을 했겠지만 하논도 음대 여신으로 유명했기에 남자 학우들 사이에서 알피노는 적이 되었다. 가끔가다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또 쿠루루 선배에 대한 오해도 풀어냈다. 그녀는 사회에서 다른 일을 하다 다시 입학했기 때문에 나이가 좀 있는 편이었고 둘은 정말 아무 사이 아닌...건 아니고 톰과 제리같은 사이 같았다. 사실 그냥 쿠루루의 일방적인 놀림이지만. 거기에 둘이 사귀는 사이라 차일 줄 알았다고 밝힌 하논 때문에 두 사람의 얼굴이 파래졌었다.
알리제가 그날 하논 집에 놀러간 이유도 밝혀졌는데 알피노의 부탁 때문이었다고 한다. 차마 늦은 밤 애인의 집도 아닌 곳에 들어갈 수 없어 알리제를 보냈고, 알리제가 찍은 그 영상은 생각보다 고가에 알피노에게 거래됐다는 걸 안 하논은 화가 잔뜩 났다. 그걸 풀어주느라 쌍둥이들은 일주일동안 매일 하논집에 출석했다.
16살에 집에 전화했었던 일도 하논은 술을 먹으며 털어놨다. 알고보니 그건 하논이 번호를 하나 틀렸었던 것이다! 그걸 안 하논은 얼굴이 새빨개져 부끄러워 했다고.
마지막으로 알리제와 알피노의 비밀은 영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걸 하논이 알게 되는 건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
-if. U end…?-
-
고백데이에 알피가 선물해준 예쁜 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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